사회

영국 왕과의 조약을 찢어버린 마오리족: 와이탕이 조약의 역사적 논쟁

memoguri7 2024. 11. 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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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원주민으로, 19세기 영국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과 중요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은 1840년 뉴질랜드 마오리족과 영국 왕실 간에 체결된 문서로, 뉴질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후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일부 마오리족 지도자들은 이 조약을 상징적으로 찢거나 무효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의 체결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840년 2월 6일, 북섬의 와이탕이에서 마오리 지도자들과 영국 대표 윌리엄 홉슨(William Hobson)이 서명했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

  1. 주권의 이전: 마오리 지도자들은 영국 왕실에 뉴질랜드의 주권을 양도한다고 동의했습니다.
  2. 마오리족의 토지 보호: 마오리족은 기존의 토지 소유권을 보존하며, 원할 경우 영국 정부에만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3. 마오리 권리 보장: 마오리족은 영국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명시되었습니다.

갈등의 시작: 조약의 모호성

조약 체결 이후, 마오리족과 영국 정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주로 조약의 두 가지 버전(영어와 마오리어) 간의 해석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번역의 문제

  • 영어 버전: 마오리족이 주권을 포기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 마오리어 버전: 영국이 "정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마오리족의 자치권은 유지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결과적 갈등

  • 토지 갈등: 영국 정부는 조약을 근거로 마오리족의 토지를 대규모로 수용하고 팔기 시작했습니다.
  • 마오리 저항: 마오리족은 자신들의 권리와 토지가 침해되고 있다고 느끼며 저항 운동을 벌였습니다.

뉴질랜드 풍경
뉴질랜드 풍경

 

조약을 찢어버린 마오리족의 상징적 행동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일부 마오리 지도자들은 조약을 찢거나 불태우는 상징적 행동으로 저항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배신에 대한 분노

  • 마오리족은 조약이 자신들의 문화, 토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체결되었다고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 정부는 이를 침해하는 정책을 지속했습니다.
  • 마오리족의 토지 90% 이상이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몰수되었습니다.

2. 주권 회복 의지

  • 조약을 찢는 행위는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마오리족의 자치와 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상징했습니다.

현대적 시각과 와이탕이 조약의 재해석

오늘날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의 역사와 법체계에서 중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와이탕이 트리뷰널(Wai Tribunal)

  • 1975년,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이 트리뷰널을 설립하여 조약 위반 사례를 조사하고 마오리족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 이 기구는 토지 반환, 보상, 문화 보호 등의 조치를 통해 마오리족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조약의 현대적 의미

  •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에서 다문화적 통합정치적 권리를 논의하는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일부 마오리족은 여전히 과거의 불공정함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느끼며, 조약을 완전히 폐기하거나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론: 조약을 넘어서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서 중 하나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마오리족의 조약 거부와 상징적 저항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권리와 정의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뉴질랜드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과거의 식민주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뉴질랜드 호수
뉴질랜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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